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아이히만 (문단 편집) === 나치당에서의 학살 행각 === 아이히만은 단순히 지시 사항 대로 서류만 성실히 써내고 도장이나 찍어주는 평범한 행정관료가 절대로 아니었다. 그는 유대인 추방, 수송, 학살의 최고위급 전문가였다. 훗날 모사드의 납치에는 법적 단죄뿐만 아니라 그를 조사해서 진상을 더 확실하게 밝히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. 1941년 아이히만은 친위대 소속 대대장(중령)으로 진급하며 국가안보부 제5국 즉, [[게슈타포]] 유대인과의 과장으로 임명되었다. 임명된 이후 폴란드 서부지역에 있는 수용소에 파견조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의 시체가 쌓여있는 끔찍한 광경을 봤다고 한다. ||<-2>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WannseeList.jpg|width=100%]]}}} || || 지역 || 숫자 || ||<-2>분류A || ||알트라이히[*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450px-Weimar_Republic_1930.svg.png]] 1938년 이전의 나치 독일 영토. [[바이마르 공화국]]의 영토와 같다.][br]오스트마르크[* [[안슐루스|합병된 오스트리아]] + [[류블랴나 주|슬로베니아 크렌스카 지방]] + 코로스카 지방][br]오스트게비테[* 독일 제국 시절의 구 동방영토 중 1차 대전 패전으로 상실한 지역. 서프로이센, 포젠 등.][br]폴란드 총독부[br]비아위스토크[br]보헤미아-모라비아 보호령[br]에스토니아[br]라트비아[br]리투아니아[br]벨기에[br]덴마크[br]프랑스 독일군 점령 지역 [br]프랑스 비점령 지역([[비시 프랑스]])[br]그리스[br]네덜란드[br]노르웨이 || 131,800[br]43,700[br]420,000[br]2,284,000[br]400,000[br]74,200[br]-유대인 없음-[br]3,500[br]34,000[br]43,000[br]56,00[br]165,000[br]700,000[br]69,600[br]160,800[br]1,300|| ||<-2>분류B || ||불가리아[br]영국[br]핀란드[br]아일랜드[br]이탈리아(사르데냐 포함)[br]이탈리아 점령 하의 알바니아[br]크로아티아[br]포르투갈[br]루마니아(베사라비아 포함)[br]스웨덴[br]스위스[br]세르비아[br]슬로바키아[br]스페인[br]튀르키예(유럽 지역)[br]헝가리[br]소련[br]소비에트 우크라이나[br]소비에트 벨라루스(비아위스토크 제외[* 비아위스토크는 [[오스트프로이센]]에 병합되었다.]) || 48,000[br]330,000[br]2,300[br]4,000[br]58,000[br]200[br]40,000[br]3,000[br]342,000[br]8,000[br]18,000[br]1,0000[br]88,000[br]6,000[br]55,500[br]742,800[br]5,000,000[br]2,994,684[br]446,484|| || 도합: || '''1,100만 이상''' || ↑1942년 1월 20일 열린 [[반제 회의]]의 회의록 문서 중 6페이지. 아이히만의 이름을 따 <아이히만 리스트>라 불린다. 유럽 전역의 유대인 수 ('''학살 대상자''')를 정리해 놓았다. 유형 A는 회의가 열렸던 1942년 초 시점에 독일이 점령하여 직할하던 지역의 유대인들이며, 유형 B는 그 외의 지역들[* 적국, 동맹국과 그 점령지, 중립국 등.]의 유대인들이다. [[제2차 세계대전]] 중인 [[1942년]]에 [[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]]의 명령으로 각 차관급 인사들이 베를린 교외의 고급주택지인 반제에 모여서 이른바 "[[반제 회의]]"가 열렸는데 아이히만도 여기에 참석했으며, 특히 유대인 문제의 "최종해결책"이 결정되는 그 회의석상에 참석했다. 다만 말단이라서[* 반제 회의 참석자들은 거진 대부분이 장성급이었고 민간 관료들도 최소 차관보급 이상이었기 때문에 중령급인 아이히만은 참석자 중 서열이 가장 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.] 한 일은 서기 비슷한 역할이었다. 그러나 《예루살렘의 아이히만》에 따르면 이때의 회의가 아이히만에게 두 가지 큰 영향을 미쳤는데, 첫째로는 하이드리히와 뮐러를 비롯한 상관들과 친분을 쌓은 것이고, 둘째로 이렇게 높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통계자료마냥 유대인 "최종해결책"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>"우리는 공무원이며 국가를 위한 행위일 뿐이다." 라고 자기합리화를 해버린 것이었다. 전쟁 중 아이히만은 제국안전중앙부에 있으면서 '''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모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책임자가 되었다'''. 아이히만은 >"500만명의 유대인을 열차에 태웠다." 라며 자랑했는데 이 실적은 상부의 주목을 받아 그는 [[1944년]]에 [[헝가리]]로 급파되었다. 아이히만은 바로 유대인 수송 과정에 착수해서 현지 [[화살십자당]]의 지원을 받아 무려 40만명의 유대계 헝가리인들을 열차에 태워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다. 그는 [[아우슈비츠]]를 비롯한 절멸수용소와 학살의 현장을 확인하고, 지도하면서 여러 학살 지역에 나타나 학살을 지시했다. 그는 유대인 대학살을 고안한 사람은 아니었지만, '''[[관리자]]이자 조직가로서 유대인이라는 적을 말살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.''' 실제로 아이히만은 이런 업적(?)들로 철십자훈장까지도 받았다. 아이히만이 유대인들을 얼마나 열심히(?) 학살했었는지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었던 [[하인리히 뮐러]]는 >''만약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다." 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. 심지어 [[1945년]]에 [[독일]]의 패색이 깊어지자 [[친위대]] 전국지도자였던 [[하인리히 힘러]]는 <유대인 학살중지령>을 내렸지만 총통의 명령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이히만은 이에 따르지 않고, 계속 [[헝가리]]에서 [[유대인]]을 학살하면서 [[홀로코스트]]를 계속해서 수행했다. 이 행동은 훗날 [[이스라엘]]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자발적으로 [[홀로코스트]]를 주도 및 수행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. 아이히만은 [[소련군]]이 진군해오자 헝가리에서 탈출해 지인 [[에른스트 칼텐브루너]]가 있었던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지만 칼텐부르너는 아이히만이 자신과 똑같이 유대인 학살 [[홀로코스트]]에 관여한 연합군의 중범죄자라 책임 추궁이 무서워서 그와 만나길 거절했다. 아이히만은 자신이 유대인 학살 [[홀로코스트]]의 책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패전이 가까워지자 사진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. 어느 날 자신의 사진이 찍히게 되자 그는 화를 내면서 카메라를 부숴서 사진찍은 사람에게 카메라 값을 변상해준 적도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